공(公)은 조정에 우뚝 서서 일을 만나면 우레처럼 움직여서 출입하고 변통함에 막힘이 없으면서도 바른길을 잃지 않는 권태사(權太師)의 유풍(遺風)과, 바라보면 의젓하고 가까이 가면 따사로워 친화로서 사람을 대하여 충심으로 심복하게 만드는 권양촌(權陽村)의 미행(美行)과, 높고 큰 띠로 풍채와 용의(容儀)를 의젓이 바로 가지며 일에 당하여서는 곧고 꿋꿋하나 질박하여 까다롭지 않은 그의 아버지인 영의정 권철의 국량(局量)을 지니고 있었다. 공(公)은 이 세 가지를 겸하여 가졌으되 공훈(功勳)과 충렬(忠烈)은 이 세 사람보다 더하였다.
– 「춘파일월록(春坡日月錄)」 중에서
임진왜란의 3대 대첩 중 하나로 불리는 행주대첩. 행주대첩은 1593년 2월 12일(음력. 양력으로는 3월 14일) 단 하루 동안 벌어졌다. 당시 행주대첩을 이끈 권율 장군은 냉철한 판단력과 리더십을 바탕으로 단 2,880명의 조선군으로 왜군 3만의 공격을 막아내고, 이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전쟁의 판세를 뒤집고 한성을 왜군에 빼앗긴 지 1년 만에 다시 수복하는 발판을 만들었다.
10 대 1의 수적 열세 속에 객관적으로 이겨내기 어려운 상황에서도 나라와 백성을 구한 권율 장군처럼 경기도의회는 전 세계적 재난 상황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도민들이 평범한 일상을 회복하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한 다양한 정책을 마련해 추진하고 있다.
행주산성은 고양시 덕양구 덕양산에 자리 잡고 있다. 정확한 축성연대는 알 수 없다. 다만 축성기법이 삼국시대 양식이고, 성에서 출토된 삼국시대의 와당과 토기 파편 등으로 미뤄 볼 때 삼국시대부터 이미 산성으로 활용됐음을 짐작할 수 있다.
꼬불꼬불 좁은 마을길을 지나 언덕 위에 오르면 대첩문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정면 3칸, 측면 2칸, 높이 4.7m의 평삼문 형태인 이곳은 지붕 안쪽에 홍살문을 넣어 행주대첩의 숭고한 뜻을 기렸다. 활짝 열린 대첩문을 통과해 언덕을 조금만 올라가면 기단 3.5m에 동상 4.5m를 합쳐 8m 높이에서 굳건한 표정으로 내려다보는 ‘권율 장군’을 만날 수 있다. 권율 장군 뒤편으로는 행주대첩을 이루어낸 관군·승병·의병·여성들이 언제라도 권율 장군과 다시 함께 전쟁에 참전하겠다는 듯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다. 물론 부조물 속에서 말이다.
충장공(忠將公) 권율(1537~1599)은 조선 경기도 강화부에서 영의정을 지낸 권철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정승 집안에서 태어나 40세가 되도록 관직에 뜻이 없어 친구들이 그 이유를 묻자 “옛날 태공망은 나이 80에 현달하여 천하를 경영하며 백성을 구제했는데, 아직 내 나이가 태공망의 반밖에 안 되는 데다 능력까지 미치지 못하네. 그러하니 어찌 출세가 늦을 것을 걱정하겠나?”라고 답했다. 출세에 연연하지 않는 기품이 느껴지는 부분이다. 하지만 부친을 여의고 뒤늦게 공부를 시작한 후 46세에 과거에 급제해 벼슬길에 올랐다.
권율은 임진왜란으로 수도가 함락되자 군대를 모집해 한성으로 북상했다. 한성을 탈환하기 위한 주둔지로 행주산성을 택하고 불시에 병력을 옮겼다. 이동과 동시에 목책을 2중으로 두르고 화차 등을 배치하며 공성전을 준비했다.
권율 휘하에 있던 군사는 고작 2,880명. 이에 반해 공격하기 위해 달려온 왜군은 3만에 이르렀다. 10배나 많은 적군이 위협적으로 행주산성을 에워쌌다. 인해전술을 앞세운 왜군의 무차별 공격이 시작됐고, 권율도 화차로 불덩이를 날리고 비격진천뢰 등을 쏘아 대며 방어를 펼쳤다. 총 9차례의 공격을 막느라 성에 있던 화살이 떨어졌고, 권율의 지휘에 따라 돌을 던지며 방어를 이어갔다. 온종일 계속된 공방전은 왜군이 성을 함락시키지 못하고 많은 사상자를 낸 채 후퇴하며 조선군의 승리로 마무리됐다.
이날 행주대첩 승리는 임진왜란의 전세가 조선군으로 기울어지며 전쟁의 판도가 뒤집히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여기에 내홍이 발생한 왜군이 남해안으로 내려가면서 한성을 수복하는 데 성공했다.
권율 장군 동상을 지나 조금 더 올라가면 권율 장군의 영정을 모신 충장사가 있다.
고양시는 코로나19 위기 전까지 매년 행주대첩일인 3월 14일에 맞춰 이곳에서 제전행사를 봉헌해 왔다.
충장사를 지나면 대첩기념관이, 대첩기념관에서 힘을 내 가파른 언덕을 올라가면 사방이 트여 있는 덕양정이 나타난다.
겨우 120m밖에 안 되는 높이지만 오르막길을 올라오는 동안 이마에 맺힌 땀을 식히고 거칠어진 숨을 고르기에 딱인 곳이다. 덕양정에 앉아 조금만 시선을 올리면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74호 행주대첩비가 보관된 대첩비각이 보인다. 세월의 흐름이 느껴지는 이 비는 권율 장군이 돌아가신 후 행주대첩의 승전 정신을 되살리고자 장군의 휘하 장수들이 뜻을 모아 1603년에 세운 것이다. 당대 최고의 문장가인 최립이 앞면 글을 짓고 한석봉이 글씨를 썼으며, 김상용이 머리글을 남겼다. 권율 장군에 대한 당대인들의 존경심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대첩비각 너머로 시선을 압도하는 행주대첩비가 자리 잡고 있다. 덕양산에서 가장 높은 위치에 올라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탁 트인 한강을 내려다보면 절로 복잡한 머릿속까지 정화되는 기분을 느낄 수 있다.
한쪽에 자리 잡은 충의정 뒤편으로 등성을 따라 내려가면 행주산성 토성을 직접 걸어 볼 수 있다. 현재 행주산성 안에는 복원된 415m의 토성 성곽이 남아 있다.
권율 장군은 행주산성에서 왜군과의 일전에 앞서 “남아(男兒)는 감의기(感意氣)요, 공명(功名)을 수복론(誰復論)하랴!(사나이는 의기만을 생각할 뿐이지, 어찌 부귀와 명예를 따지겠는가!)”라는 말을 남겼다. 그리고 자신의 생각을 실천했다. 행주대첩 당시 하루 종일 쉴 새 없이 계속된 공방전에 군사들이 기갈을 겪으며 괴로워할 때 머리에 쓰고 있던 투구를 벗어 물을 따라 주며 사기를 북돋웠다고 전해진다. 언제 어디에서 자신에게 조총이 날아올지 모르는 상태에서 자신의 목숨보다 병사를 먼저 생각한 것이다.
행주산성 토성을 따라 걷다 보면 토성이 간직한 선조들의 치열한 투쟁의 역사와, 위기 상황에서도 자신의 영달보다 나라와 백성을 먼저 생각한 권율 장군의 충정이 느껴져 절로 숙연해진다.
“권율 장군의 애민정신 되새겨 위기 극복에 힘을 쏟겠습니다”
권율 장군은 임진왜란 기간 중 많은 전투에서 기지를 발휘해 휘하의 군사들과 지역 백성을 지키고 결국 나라를 구했습니다. 군사들의 어려움을 해소하고 사기를 북돋우기 위해 투구를 벗어 물을 따라주던, 뛰어난 전략으로 기지를 발휘해 전쟁을 승리로 이끌던, 판세를 뒤집고 결국 재난을 극복해 낸 그의 리더십을 떠올려 봅니다. 최근 우리는 코로나19라는 재난 상황에 빠져 있습니다. 수요가 줄어들면서 기업의 매출도 줄어들었고, 노동자들이 어려움을 겪기 시작했으며, 각자의 영역에서 경제활동에 최선을 다해 온 자영업자와 소상공인들도 연쇄적으로 힘들어하고 있습니다.
경기도의회는 도민들이 겪고 있는 사회·경제적 어려움에 깊이 공감하고 있습니다. 현재의 어려움을 극복하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지역화폐와 재난지원금을 통해 경기를 활성화하고 상생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숱한 고난 속에서도 국가와 백성을 먼저 생각하고 위기를 딛고 일어나 승리를 거둔 권율 장군처럼 저희 경기도의회도 도민의 안정적이고 윤택한 생활을 위해 신발끈을 다시 묶고 도민을 먼저 생각하며 힘차게 뛰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