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도 바로 알기

역사에 기록된 우리의 영토, 독도

우리나라가 독도를 우리 영토로 인식하고 통치해 온 사실은 고문헌과 현대 문헌에 두루 기록돼 있다. 독도가 일본 영토가 아니라는 일본의 공식 기록 역시 존재한다. 독도와 관련한 당시 정부기관 편찬 기록을 살펴보자.
정자은 / 참고 외교부


▲ 삼국사기


▲ 세종실록지리지

<삼국사기>, <세종실록지리지> 등에 기록된 독도
<삼국사기>에는 “신라 이찬 이사부가 우산국을 정벌해 신라가 우산국을 복속 한다”라는 독도와 관련한 최초의 기록이 있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울릉도와 독도가 강원도 울진현에 속한 두 섬” 이며 “우산(독도)과 무릉(울릉도) 두 섬은 서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아 날씨가 맑으면 바라볼 수 있다”라고 기록돼 있다. 독도에 관한 기록은 <신증동국여지 승람>, <동국문헌비고>, <만기요람>, < 증보문헌비고> 등 당시 조정이 편찬한 문헌에서도 일관된 내용이 나온다. 특히 <동국문헌비고>에는 “울릉(울릉도)과 우산은 모두 우산국 땅이며, 우산은 일본이 말하는 송도”라고 기술하고 있다.

 

 
17세기 한일 독도 분쟁과 영토 주권 확인
1693년(숙종 19년) 당시 일본 돗토리번의 오야 가문과 무라카와 가문은 조선의 영토인 울릉도에서 불법조업을 하다 안용복을 비롯한 조선인들과 만났다. 일본의 두 가문은 에도막부에 조선인들이 울릉도 바다에 다니는 것을 금지해 달라고 청원했고, 이후 막부가 쓰시마번에 조선 조정과 교섭을 지시해 양국 간 ‘울릉도 쟁계(鬱陵島爭界)’가 시작됐다. 에도막 부는 1695년 12월 25일 돗토리번에 대한 조회를 통해 울릉도와 독도 모두 돗토리 번에 속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한 후 (‘돗토리번 답변서’), 1696년 1월 28일 일본인들이 울릉도 방면의 바다로 가는 것을 금지했다.

 

독도가 일본 땅이 아니라는 일본의 공식 기록
1877년 메이지 시대 일본의 최고 행정기 관인 태정관은 에도막부와 조선 조정 간울릉도쟁계 결과 울릉도와 독도가 일본 소속이 아님이 확인되었다고 판단하고, ‘태정관지령’을 통해 ‘다케시마(울릉도) 외 일도(독도)는 일본과 관계가 없다는 것을 명심할 것’을 내무성에 지시했다.
내무성이 태정관에 질의할 때 첨부했던 지도인 ‘기죽도약도’에 울릉도와 함께 독도가 그려져 있는 점 등으로 볼 때 위에서 언급된 ‘다케시마 외 일도’의 일도가 독도임을 나타내는 것은 명백하다.

▲ 태령관지령과 기죽도약도
▲ 대한제국 칙령 제41호

 

 

대한제국의 독도 통치와 수호
대한제국의 황제 고종은 1900년 10월 25일 ‘독도는 울릉도의 부속 섬이며 울도(울릉도) 군수가 독도를 관할한다’는 내용을 명시한 ‘대한제국 칙령 제41호’ 를 제정했다. 1906년 3월 28일 울도 군수 심흥택은 울릉도를 방문한 일본 시마 네현 관민조사단으로부터 일본이 독도를 자국 영토에 편입했다는 소식을 듣고, 다음 날 이를 강원도 관찰사에게 보고했다. 보고서에는 ‘본군 소속 독도’라는 문구가 있어, 1900년 ‘칙령 제41호’에 나와 있는 바와 같이 독도가 울도군 소속이었음을 명확히 알 수 있다. 강원도 관찰사서리 춘천 군수 이명래는 1906년 4월 29일 이를 당시 국가 최고 기관인 의정부에 ‘보고서 호외’로 보고했고, 의정부는 5월 10일 ‘지령 제3호’에서 독도가 일본 영토가 되었다는 주장을 부인하는 지령을 내렸다.

 

 

[어르신들을 위한 큰글씨]

독도가 우리 땅인 역사적 근거

· <삼국사기> 등에는 독도가 우리 영토라는 기록이 있으나 일본에는 없거나 오히려 일본의 영토가 아니라는 공식 문서가 존재.

· 1693년 한일 독도 분쟁에서 일본의 에도막부는 ‘독도가 돗토리번에 속하지 않는다’ 라는 ‘돗토리번 답변서’를 일본인들에 하달.

· 1877년 메이지 시대 행정기관인 태정관은 ‘울릉도와 독도가 일본과 관계없다는 것을 명심할 것’이라는 내용의 ‘태정관지령’을 내무성에 전달.

· 고종은 1900년 10월 25일 독도를 울릉도의 부속 섬으로 정하는 ‘대한제국 칙령 제41호’를 제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