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마을 옛이야기 – 남양주시 편

팔선녀가 놀던 곳
팔당의 아름다운 전설 外

남양주시의 전설과 설화는 서울과 가까운 이유로 조선 왕실과 관계된 이야기와 지명 유래 이야기가 많이 전해진다.

김화숙 / 사진·출처 경기도메모리

세조 임금이 잠결에 들은 종소리
수종사(水鐘寺) 창건 설화

수종사는 한강 변 운길산 중턱에 자리를 잡아 한강을 내려다보는 경관이 아주 빼어난 사찰이며 조선의 임금 세조와 관련된 설화가 전해진다. 세조의 행렬이 도착한 것은 해 질 무렵이었다. 오대산을 다녀오는 임금의 행차가 한양 대궐까지의 100리 길을 앞두고 하룻밤 묵어갈 행궁을 마련한 곳은 양수리였다. 세조는 남한강과 북한강이 한곳으로 모여드는 이곳에서 아름다운 붉은 노을과 강가 풍경을 조망하다가 잠자리에 들었다. 잠시후 임금은 청아한 종소리를 듣고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참으로 좋은 종소 리로다. 이 근처에 큰 절이 있음이야.

▲수종사

“암굴 천장에서 물방울이 떨어지는데 큰절의 아름다운 범종 소리와 흡사했다.”

그런데 어찌하여 대신들은 절이 있다는 얘기는 하지 않았을꼬.” 임금은 종소리가 강 건너 산기슭에서 들려온다는 걸 알았고, 그 청아하고 아름다운 소리를 감상 하며 잠이 들었다. “이 근처에 큰 절이 있는 듯한데 어떤 절이더냐?” 신하들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 서로를 바라보았다.
“전하, 이곳 인근에 종소리가 들릴 만한 절은 없사옵고 지난밤에 종소리는 들리지 않았나이다.” “내가 헛것을 들었을까.
그럴 리가 없다. 이는 분명 부처님이 어떤 계시를 내리심이로다.” 임금은 신하 들에게 강 건너 산을 조사하도록 했다.
한나절 만에 돌아온 군사들과 대신들은 기다리고 있던 왕에게 뜻밖의 소식을 전했다. 그 산은 운길산이고, 산 정상 가까 이에서 그리 깊지 않은 암굴을 발견했 다는 것이었다. 신하들이 군사를 데리고 암굴 앞에 이르니 18개의 나한상 앞쪽의 암굴 천장에서 물방울이 일정한 간격으로 떨어지는데 그 소리가 큰절에서 듣는 아름다운 범종 소리와 흡사하다는 보고였다. 암굴에 도착한 세조는 나한들을 보고 경탄의 마음을 가눌 길이 없었 다. 신묘한 조화로 자신을 이곳까지 오게 한 그 신력에 감복하며 경건하게 절을 올렸다. 세조는 한나절을 암굴 앞에 서서 산세와 양수리의 풍광을 즐기다가두 그루의 은행나무를 심고 궁궐로 돌아갔다고 한다.

(관련 명소와 명물 수종사, 은행나무)

 

함흥에서 환궁하는 태조
여덞 밤을 보낸 곳 ‘팔야리’

▲ 태조 어진

 

“태조는 남행하는매 사냥꾼을 따라 내려오다 지금의 팔야리에 이르러 여덟 밤을 보냈다.”

남양주시 팔야리의 지명 유래담은 조선 태조가 함흥에서 한양으로 환궁하는 과정에서 생긴 설화다. 태조의 다섯째 아들인 태종이 두 차례에 걸쳐 여러 명의 왕자를 죽이고 조선의 세 번째 왕위에 오르자 태조는 화가 나 고향인 함흥으로 가서 한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이에 태종은 아홉 번이나 함흥으로 신하들을 보내 환궁할 것을 탄원했지만 태조는 함흥으로 오는 신하를 모두 죽여 가며 환궁을 거부했다. 이때 생긴 말이 ‘함흥차 사’이다. 한번은 사신 남재(南在)가 함흥에 가게 됐다. 그는 꾀를 내 매 사냥꾼에게 함흥 주변에서 사냥하도록 하고 자신은 새끼를 낳은 지 얼마 안 되는 암소를 타고 태조를 찾아가 “벼슬에서 물러나고 어떤 매 사냥 패를 만나 여기까지 왔다” 라고 했다.

이때 암소가 우는 소리가 나자 말 못하는 짐승도 새끼가 그리워 운다며 태조가 자책하는데, 사냥꾼들이 꿩을 안고 들어 왔다. 사냥 구경에 나선 태조는 수십 마리의 매가 꿩과 산새를 잡아채는 것을 보며 남행(南行)하는 사냥꾼을 따라 내려오다가 지금의 남양주시 팔야리에 이르러 여덟 밤을 지내게 됐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삼각산이 보이자 태조는 속은 것을 알았으나 결국 궁궐을 짓고 눌러앉고 말았다. 그때 매사냥을 한 산은 ‘매봉 산’, ‘매람산’ 등으로 불린다.

(관련 인물과 명소 태조, 태종, 팔야리, 매봉산)

<남양주 마을 이름의 유래>

팔선녀가 놀던 자리 ‘와부읍 팔당리’

‘팔당’ ‘바댕이’로도 불리는 마을이다. 강의 양쪽 산세가 험준 하고 수려해 팔선녀가 내려와 놀던 자리가 여덟 곳이나 있고, 이후 그 자리에 8개의 당(堂)을 지어놓았다고 해서 ‘팔 당’이라 불렸다.
글 읽는 소리가 끊이지 않던 마을 ‘와부읍 월문리’

월문리는 월골의 ‘월(月)’ 자와 문곡리의 ‘문(文)’ 자를 따서 붙였다. 문곡리에는 조선 시대 문곡(文谷)이란 호를 가진 선비가 살았는데 마을에 글 읽는 소리가 시냇물 흘러가듯 끊이지 않았다. 훗날 그의 호를 따 마을 이름이 지어졌다.

세조 임금과 명지관
벌을 피한 곳 ‘벌우개’

벌우개의 지명 유래담은 명풍수가를 만난 세조의 이야기와 관계돼 있다. 세조는 훗날 자신이 자리할 묫자리를 구하기 위해 정체를 숨기고 직접 답산을 하던중 풍수적으로 매우 좋지 않은 곳에 묫자리를 쓰고 있는 상주를 만났다. 그대 로 지나칠 수가 없어 그에게 300냥을 주며 다른 곳으로 이장하라고 일렀다. 그묫자리를 잡아준 사람을 물으니 바로 자신이 찾던 이생원이라는 지관이었다. 이생원의 집에 이르러 왜 좋지 않은 묫자 리를 잡아주었느냐 물으니 그는 “그 근처에 좋은 자리가 있지만 가난한 상주 에게 당장 300냥의 큰돈이 생길 수 있는 자리를 정해주었다”라고 답했다. 이에 감탄한 세조는 “이와 같이 풍수를 잘아는 사람이 산골의 비바람도 가리지 못하는 집에 거주하며 이 고생을 하느냐” 라고 물으니 그는 “국왕이 친히 방문하실 곳이므로 이곳에 산다”라며 짚자리를 문밖에 깔고 머리를 조아렸다. 이생원의 풍수적 혜안에 놀란 세조는 그와 동행해 현재 남양주 진접읍에 위치한 광릉 자리를 능의 자리로 정했다. 능을 파는데 그곳에서 큰 벌이 나올 것이라 해 주관하는 지사가 지금의 장현리 벌우개로 대피해 큰 독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능을 파기 시작하자 곧 뒤웅박만 한 벌이 쫓아와서 독을 쏘았으나 지사는 목숨을 구했으며, 그 뒤 이 동네를 벌우개라고 불렀다.

(관련 인물과 명소 세조, 광릉)

 

 

춤으로 목숨을 구한 차수복
살내벌 지명 이야기

세조와 정희왕후의 무덤이 있는 광릉 앞쪽에 있는 벌판을 살내벌이라고 부른 다. 한번은 임금이 광릉에 참배를 하러 가는데 차수복이라는 사람이 얼굴을 부채로 가리지 않았다. 신하들은 이러한 행동을 임금에 대한 불경죄로 간주하고 차수복의 목을 베라고 명했다. 그런데 차수복은 죽음을 앞두고도 춤을 추며 동구 밖에 있는 처형장까지 끌려갔다. 이런 모습을 능에 참배를 마치고 내려오는 임금이 보게 됐다. 죽으러 가는 길에도 특이하게 춤을 춘다고 해서 임금이 참수를 멈추고 살려주라고 명을 내렸다. 그리고 임금은 다음부터는 얼굴을 가릴 수있도록 부채를 차수복에게 하사했다. 이후로 차수복이 춤을 추었던 장소를 임금이 ‘살려주라’고 했다는 의미에서 ‘살내 벌’이라고 불렀다.
(관련 명소 살내벌, 광릉)

 

“뒤웅박만 한 벌이 독을 쏘려고 지관을 쫒았으나 벌우개에서 큰 독 안에 들어가 목숨을 구했다.”

 

 

 

[어르신을 위한 큰 글씨]

남양주의 전설과 설화

수종사 전설

조선 임금 세조가 잠결에 청아한 종소리를 들었다. 찾아낸 암굴에는 열여덟 나한이 있었다. 세조는이 자리에 절을 세우게 했고, 이름을 수종사(水鐘寺)라 명했다.

팔야리 유래

조선 임금 태종이 형제들을 죽이고 왕위에 오르자 태조는 고향인 함흥으로 떠나 돌아오지 않았다.
사신 남재가 꾀를 내 태조와 매사냥을 보며 남쪽으로 향했다.
이때 여덟 밤을 머문 곳이 팔야리다.

벌우개 유래

세조가 자신의 묫자리를 구하기 위해 묘한 풍수가를 만나 광릉 자리에 터를 잡았다. 능 자리에서 뒤웅박만한 벌이 나와 풍수가를 쏘았으나 그는 벌우개로 대피해 큰 독을 뒤집어 써 피했다.

차수복과 살내벌 설화

조선 임금이 광릉을 참배하러 가는데 차수복이란 사람이 얼굴을 가리지 않았다. 그는 참수형을 받았으나 춤을 추며 처형장에 끌려갔다. 임금이 이를 보고 살려주라 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