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절한 사부곡
수원 화성으로 피어나다
성곽을 따라 천천히 걸으며 산책할 수도 있고, 외성 바깥을 돌며 화홍문, 서북공심돈, 서북각루 등 아름다운 스폿을 감상할 수도 있다. 걷는 게 힘들다면 유유히 떠가는 구름과 고즈넉한 동북각 루를 담은 호수 용연에 머무르기만 해도 좋다. 조선의 임금 정조가 아버지를 그리며 지은 아름다운 성 수원 화성을 소개한다.
글 정명곤 / 사진 박진우 / 참조 수원문화재단
아버지를 그리며 축성하다
조선 건축의 꽃으로 불리는 수원 화성을 바라보면 옛 인도 무굴제국의 황제 샤 자한이 죽은 아내 뭄타즈 마할을 기리기 위해 22년에 걸쳐 완성한 아름다운 건축물 타지마할의 이야 기가 떠오른다. 다시는 볼 수 없는 사랑하는 아내를 그리워하며 지은 타지마할과 같이 애통하게 돌아가신 아버지를 그리며 지은 수원 화성은 보는 이로 하여금 아버지를 향한 정조의 애절한 마음이 느껴지는 듯해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정조는 세자에 책봉됐으나 당쟁에 휘말려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뒤주 속에서 생을 마감한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침을 양주 배봉산에서 수원 화산으로 옮긴 후 수원 화성을 축성하기 시작해 1796년 9월에 완공했다.
모순의 조화 이룬 수원 화성
풍수지리에 조예가 깊은 정조가 설계에 관여한 수원 화성은 오히려 풍수지리에 부합하지 않는 면을 보인다. 북문인 장안 문에서 남문인 팔달문을 연결하는 삼남대로와 큰 하천이 수원 화성을 남북으로 관통하는 한편, 성 내부에는 열십자(十) 형 큰길을 조성하고, 주산인 팔달산은 길게 이어지는 용맥(龍 脈)을 갖추고 있지 않으며, 닫혀야 하는 수구 또한 크게 열려 있다. 동양 예술 전문가는 수원 화성의 이러한 모습과 관련해 간선도로와 물줄기가 읍치(邑治) 내부를 관통하는 모습은 둘러싸임으로 형성되는 소우주를 깨뜨리는 것을 의미하고, 이로써 장소의 정체성이 허물어진다고 말한다. 이렇게 ‘관통’과 ‘열림’을 추구한 수원 화성의 구조는 정조가 18세기 조선의 상황에 맞게 풍수를 재해석해 근대 지향적 도시 수원 화성을 설계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참고: ‘정조의 풍수론과 수원 화성’(김병주, 2018)
장안문
수원시 팔달구 장안동
장안문은 수원 화성의 북문이다. 한자로 ‘長 安門’으로 쓰는데, 정조는 장안의 의미를 ‘북 쪽으로 서울의 궁궐을 바라보고 남쪽으로 현륭(융릉)을 바라보며 만년의 편안함을 길이 알린다’라고 풀이했다. 장안문은 남문인 팔달문과 더불어 화성에서 가장 웅장하고 높은 격식을 갖춘 건물이다. 2층의 누각은네 모서리 추녀가 길게 경사를 이루면서 용마루와 만나는 우진각 지붕 형태다. 문밖에는 항아리 모양의 옹성을 만들고, 방어를 목적으로 좌우에 적대를 세웠다.
화홍문(북수문)
수원시 팔달구 북수동
화홍문(북수문)은 수원 화성의 북쪽 성벽이 수원천과 만나는 곳에 설치한 수문이다. 일곱 칸의 홍예문 위로 돌다리를 넣고 그 위에 누각을 지었는데 화홍문이라는 별칭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수문을 통해 흘러 나온 물이 물보라를 일으키며 장쾌하게 떨어지는 모습은 수원 화성에서 꼭 보아야 할아름다운 경치로 손꼽는다.
동북각루와 방화수류정
수원시 장안구 연무동 190
동북각루는 화성 동북쪽 요충지에 세운 감시용 군사시설이지만 아름다운 연못 용연과 함께 있어 경치를 즐기는 정자로 이용됐 다. 정자의 별칭은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 이다. 정조 임금은 이 이름을 ‘현륭원이 있는 화산과 수원 읍치를 옮긴 땅 유천을 가리킨 다’라고 풀이했다. 용연에 비친 달이 떠오르는 풍광이 절경이다.
서북공심돈
수원시 장안구 영화동 332
서북공심돈은 수원 화성 서북쪽에 세운 3층의 망루로 주변을 감시하고 공격하는 시설이다. 공심돈은 속이 빈 돈대라는 뜻으로 우리나라 성곽 중 수원 화성에서만 볼 수 있다. 정조는 서북공심돈을 보며 “우리나라 성곽에서 처음 지은 것이니 마음껏 구경하라”며 만족스러워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수원 화성의 공심돈은 현재 세 곳이 있지만 서북공심돈만이 축성 당시 모습으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