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 앞에 사람들이 모여 있다. 코로나19를 의식한 듯 마스크를 쓴 사람들이 띄엄띄엄 서 있다. 이윽고 노쇠한 표정을 한 전두환 씨가 경호원의 부축을 받으며 법정에 들어선다. 약속이나 한 듯 사람들의 입에서 사나운 욕설이 쏟아져 나온다.
지난 4월 27일 광주지방법원에서 벌어진 전두환 씨의 재판 풍경은 광주의 아픔이 여전히 풀리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5·18민주화운동 40주년을 맞은 올해까지, 그 고통과 상처는 여전히 아프게 남아 있다.
5·18민주화항쟁은 전두환 신군부의 권력 찬탈에서 시작됐다. 1979년 10·26사태로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되자 시민들은 어두운 독재의 터널을 지나 ‘서울의 봄’을 갈망했다. 하지만 그해 겨울 12·12사태로 권력을 장악한 전두환 일당의 행태에 시민들은 분노하기 시작했고, 1980년 5월 15일 서울역에서 벌어진 대학생 시위를 계기로 시민들의 저항은 전국으로 확산됐다.
위협을 느낀 신군부는 비상계엄령을 내려 정치인과 재야인사들을 비롯해 시민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하기 시작했다. 전국이 신군부의 폭압에 숨죽여 있을 때 유일하게 저항을 굽히지 않은 곳이 광주였다. 광주시민들은 공수부대의 실탄에 맞아 수많은 시민들이 희생되면서도 꿋꿋이 항쟁을 이어갔다. 신군부는 학살을 서슴지 않으며 무력 진압으로 일관했고, 광주시민들의 숭고한 항쟁은 10일 만에 막을 내리게 된다.
훗날 광주시의 발표에 따르면 5·18민주화항쟁의 희생자는 사망 264명, 행방불명 166명, 부상피해 3,139명에 이른다. 하지만 여러 5·18 관련 단체들은 확인되지 않은 사망자와 행방불명자를 합치면 이보다 훨씬 더 많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1980년 5월 광주의 외침으로부터 지난 4·15총선까지 40년의 시간이 지났다. 광주를 기억하는 시민들은 1987년 6월 항쟁으로 일어나 전두환 정부를 상대로 “호헌 철폐, 독재 타도”를 외치며 대통령직선제와 5·18청문회를 이끌어냈다. 당시 온 거리를 가득 메운 넥타이부대와 학생들은 역사의 주체였고, 민주주의의 주인공들이었다.
이후 2016년 겨울, 시민들은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는 노래를 부르며 다시금 광장으로 쏟아져 나왔다.
6월 항쟁을 직접 겪은 세대들은 각자 자기 아이들의 손을 잡고 민주주의의 뜨거운 열망을 노래했다. 항쟁의 분노를 넘어 민주주의 주체로서 그 권리를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
광장을 경험한 시민들의 열기는 지금도 살아 있다. 코로나19라는 유례 없는 악조건 속에서도 이번 제21대 총선은 66.2%라는 높은 투표율을 보였다. 이는 1987년 6월 항쟁 직후 시민들의 정치참여 열기가 반영된 1988년 제13대 총선 당시 75.8%의 높은 투표율과 닮은꼴이다. 이번 총선은 특정 정당의 승패를 떠나 시민의 정치참여 의지가 극명하게 나타난, 그야말로 우리나라 민주주의 역사에 한 획을 긋는 사건이었다
이번 총선은 올해가 5·18민주화운동 40주년의 해여서 더욱 의미가 깊다. 하지만 5·18민주화운동은 아쉽게도 철저한 진상규명이 이루어지지 못한 채 여전히 우리가 풀어야 할 큰 과제로 남아 있다.
그런 의미에서 경기도의회는 5·18민주화운동 40주년을 맞아 숭고한 역사적 의미를 계승하는 데 노력하고 있다. 도의회 보건복지위원회는 지난 2월 ‘5·18민주화운동 정담회’를 열어 도내에 거주하는 5·18민주화운동 피해자들이 우리나라 민주주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사실을 인정하고 그들의 권익과 복지 향상을 위한 정책적 차원의 노력을 다하기로 다짐했다.
경기도의회는 여느 광역의회보다 앞서 5·18에 대한 민주주의적 가치를 소중히 인식하고, 더 나아가 아직 밝혀지지 않은 역사적 실체에 접근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올해에는 민주주의를 염원하는 모든 시민의 힘으로 5·18민주화운동의 진상이 밝혀지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