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가 있는 경기 한바퀴

학문의 연결고리, 순암 안정복 광주 ‘이택재’


시대나 학문이 다음 흐름으로 넘어갈 때 이전의 사상과 생각이 갑자기 전복되는 일은 거의 없다. 하나씩 순차적으로 변화하는데, 그 중간에서 연결고리 역할을 하는 학자가 등장한다. 성리학에서 실학으로 넘어가는 시기에 가장 대표적인 학자가 순암 안정복(1712~1791) 선생이다. 새로운 학문인 실학을 주장하면서도 천주학은 배격한 인물로, 초기 실학자인 이익 선생과 후기 실학자인 정약용 선생의 중간에 위치한 학자다.
안정복 선생은 평생 독서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1761년 경기도 광주에 이택재를 짓기에 이른다. 이택이라는 이름은 ‘벗끼리 서로 도와 학문을 닦는다’는 의미다. 아마도 이택재는 책을 살 형편이 되지 않았던 안정복 선생이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만든 것이 아닐까 싶다. 지금으로 치면 공유 도서관 같은 개념이다.
이곳에서 안정복 선생과 유생이 모여 저마다의 학문을 닦았다. 현재 이택재는 안정복 선생을 기리기 위한 사당으로 사용되고 있다. 대문을 지나 작은 정원과 서재, 재실을 지나쳐 걸어가다 보면 학문에 매진하던 조선 시대 유생들의 발걸음을 잠시나마 느끼게 된다.
주소 광주시 텃골길 49

사상의 집대성, 다산 정약용 남양주 ‘정약용 유적지’


조선 시대 실학자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은 단연 다산 정약용(1762~1836) 선생이다. 성호 이익 선생에게 영향을 받아 실학을 시작했으며, 「목민심서」와 「경세유표」 등 그의 대표 저서들은 여전히 한국인의 필독서로 자리매김하고있다. 한마디로 ‘실학을 집대성한 학자’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정약용 선생의 실학사상은 조선의 근대에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정약용 선생이 서거하고 100년 뒤 일제강점기 시절 그의 사상이 조선학 운동의 중심에 있었다.
남양주는 정약용 선생이 태어난 곳이며, 동시에 생애 마지막 순간을 보낸 지역이기도 하다. 아름다운 한강 경치와 잘어우러지는 정약용 유적지에 들어서면 입구에는 정약용 선생이 고안한 기구들이 전시돼 있고, 정원 안에는 고즈넉한 건물이 자리해 있다. 유적지 한쪽에 마련된 정약용 기념관에서는 그의 사상과 일대기를 한눈에 볼 수 있다.
유적지를 둘러보고 나서 다산생태공원으로 향했다. 조용한 산책로와 강물이 들고나는 강변. 실학은 어쩌면 이런 순간을 누구나 즐기라고 만들어진 것인지도 모른다. 신분과 상관없이 자연을 노래하고, 여유를 즐기고, 행복한 삶을 영위하라고 말이다.
주소 남양주시 조안면 다산로747번길 11

재야의 스승, 성호 이익 안산 ‘성호 박물관’


18세기 조선 시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 휩쓸고 간 뒤 사회는 기형적으로 변하고 있었다. 전쟁으로 많은 민중이 희생됐다. 반면 양반의 숫자는 오히려 늘어났다. 상업이 급속히 발달하면서 신분을 돈으로 사는 사람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학문은 시대의 속도에 맞춰 변화하지 못하고, 오히려 교조화되고 있었다. 이때 등장한 인물이 성호 이익(1681~1763) 선생이다. 실학의 근간을 마련했다고 평가되는 인물. 학문의 실용성과 실천을 강조한 그는 평생 관직을 갖지 않고 재야에서 활동했다.
이익 선생의 흔적을 찾아 안산 성호 박물관을 찾았다. 성호 박물관은 지난 2002년, 안산에서 평생 학문을 다진 이익 선생을 기념하기 위해 개관했다. 지하 1층과 지상 2층에 전시실이 마련돼 있는데, 현재는 코로나19 여파로 지상 2층의 전시실만 운영 중이다. 2층 전시실에는 성호 선생의 친필 저서와 실학 관련 서적이 전시돼 있다. 대부분 복제가 아닌 실제 유물이다.
살아 움직이는 듯한 이익 선생의 글씨를 보고 있노라면, 마치 조선 시대로 시간여행을 하는 듯한 기분이 든다. 관람을 마친 뒤 박물관 건너에 마련돼 있는 이익 선생 묘지를 찾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사람은 죽지만, 좋은 정신과 학문은 영원하다고….
주소 안산시 상록구 성호로 1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