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愛서 광명 편 조선 시대 대표적 청백리 ‘오리 이원익’ 부귀공명보다 나라와 백성의 안위를 우선하다


조선 시대 대표적 청백리 ‘오리 이원익’ 부귀공명보다 나라와 백성의 안위를 우선하다
왕이 승지를 보내 이원익의 안부를 묻게 하며 “그의 기력은 어떠하고, 살고 있는 집은 또 어떠한지 자세히 서계를 올리라”고 했다. 승지가 “집은 몇 칸 초옥에 불과하여 바람과 비를 가리지 못하고, 한 두락의 밭이나 두어 명의 노비도 없이 그저 온 식구가 월봉으로 겨우 입에 풀칠합니다”라고 아뢰었다. 왕이 답하기를 “40년 동안 정승을 지냈으면서 초옥에 살며 바람과 비도 가리지 못한다니, 그의 청백한 삶이야말로 옛날에 없던 일이다. 정당(正堂)을 지어주고 무명 이불과 흰 명주 요를 주어 그의 높은 정신이 이어지도록 하라”고 했다. 이원익이 사양하니, 윤허하지 않고 공신에게 내리는
노비를 다른 예에 따라 주도록 명했다.

-「인조실록 24권, 인조 9년 1월 11일」에서

청렴 사상을 기반으로 투명성을 지키는 의정활동 노력

오리(梧里) 이원익(1547~1634)은 조선 선조, 광해군, 인조 시대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영의정으로 활약했다. 특히 역사상 가장 어려운 시기인 임진왜란과 정묘호란을 겪는 동안 나라를 위해 많은 일을 해냈다. 자리에 연연하거나 안위를 생각하지 않고 올곧은 주장을 하다가 귀양을 가기도 하고, 뛰어난 능력으로 복직이 반복되는 동안 흔들림 없이 원칙을 지키는 관료의 삶을 유지했다. 무엇보다 자식이나 사위·친척들의 뒤를 봐주지 않고 나랏일에 몰두한 까닭에 그의 뒤를 이어서 고위직에 오른 주변 사람도 없고, 퇴임한 후 무너지고 허술해 비바람을 가리지 못할 정도의 초가에서 청빈한 삶을 살았다. 경기도의회는 이처럼 청렴을 기반으로 관료 생활을 이어간 이원익 선생의 정신을 이어받아 홈페이지와 SNS 채널을 활용해 도민들에게 의정활동을 공개하는 등 알 권리를 보장하는 투명한 활동을 펼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청렴한 생활로 백성과 관료의 귀감이 되다

이원익 선생은 조선시대 대표적 청백리이자 구국과 민생안정에 힘쓴 실천적 관료다. 선생의 종가가 자리한 광명시 소하동에는 그의 발자취를 느낄 수 있는 ‘소하역사인물벨트’가 조성돼 있다. 선생의 고택이자 종가박물관이기도 한 충현박물관에서 충현역사공원과 이원익 선생 묘역을 지나 오리서원으로 이어지는 ‘선비의 길’이 바로 그곳이다.
먼저 선생이 생의 마지막을 지낸 고택에 자리한 충현박물관을 찾았다. 이곳은 전국 최초의 종가박물관으로, 선생의 13대 직계손인 이승규 씨가 사재를 출연해 건립했다. 대문을 들어서면 계단 오른쪽으로 충현관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충현관에는 이원익 선생의 흔적을 느낄 수 있는 다양한 유물이 전시돼 있다. 계단을 올라가 들어서면 이원익 선생의 영정과 친필, 교서, 문집 등을 확인할 수 있다. 여기에서 아래층으로 이동하면 오랜 시간 종가에서 대대손손 물려 내려온 제기와 쌀독 등 민속생활용품 등을 볼 수 있다.
건물을 나와 다시 정면에 보이는 한옥 건물로 들어서면 ㄱ자형 안채와 ㄴ자형 문간채가 안마당을 중심으로 ㅁ자형으로 배치돼 있다. 이 집은 1960년대 말까지 이원익 선생의 후손이 대대로 거주하던 곳이다. 특히 이러한 구조는 20세기 초에 건립된 경기 지역 살림집의 원형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어 경기도문화재자료 제98호로 지정됐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품격이 느껴지는 건물로, 빛바랜 마루 등이 세월이 흐를수록 멋있어지는 한옥의 매력을 제대로 보여준다.
왼쪽 문을 지나 더 안쪽으로 들어서면 400년 된 측백나무와 이원익 선생이 거문고를 연주하던 ‘탄금암’이 자리 잡고 있다.
그 뒤쪽으로 보이는 건물이 인조가 경기감사에게 명해 하사한 ‘관감당’이다. ‘보고 느껴야 할 집’이라는 뜻의 관감당은 ‘이원익 선생의 청렴한 생활 자세를 보고 느끼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방 2개와 작은 마루가 하나 있는 곳으로, 하사받은 후 선생이 돌아가실 때까지 4년가량 거주했다. 관감당은 경기도 문화재자료 90호로 지정돼 있다. 다만 본래 건물은 병자호란 때 소실됐다가 1694년에 중수됐고, 1980년대 화재로 소실됐다가 개축됐다. 또 관감당 뒤에는 이원익 선생의 영정을 모신 사당 ‘오리영우(梧里影宇)’가 자리 잡고 있어 함께 둘러보면 좋다.

가을날 한적한 도보 산책에도 제격

충현박물관을 나와 조금만 걸어가면 충현역사공원이 나온다. 이원익 선생의 발자취를 느낄 수 있는 공간을 연결한 ‘선비의 길’은 가을 햇살을 맞으며 쉬엄쉬엄 걸어가기에 좋다. 공원 안쪽에 선생의 생애와 행적을 상세하게 소개하는 전시물이 자리하고 있어 앉았다 가거나 둘러보고 가기에도 적당하다.
충현역사공원을 지나 모퉁이를 돌면 ‘오리서원’이 자리하고 있다. 입구에서 올라가 오른편으로 가면 이원익 선생의 묘가 자리 잡고 있지만, 현재는 출입금지 구역으로 출입이 통제되고 있다.
해당 갈림길에서 왼편의 언덕으로 좀 더 올라가면 그곳이 오리서원이다. 오리서원은 선생의 생애와 공적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곳으로, 인의정·예지실·디지털전시관 등 다양한 공간에서 공렴학당·인문학당·문화마당 등의 수업이 진행되고 있다.
또한 동아리 모임이나 강연 등을 위해 대관까지 하고 있어 학습은 물론 나눔과 소통도 할 수 있다. 길지 않은 거리지만 한산한 가을날 가볍게 걸으면서 둘러보기 좋은 충현박물관, 충현역사공원, 오리서원 등은 청백리와 이 시대가 원하는 관료상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의원의 시선

“이원익 선생의 애민사상을 이어받아 도민이 행복한 경기도 만들 것”

청백리로 유명한 오리 이원익 선생은 퇴청 후에도 명나라와의 외교에 대비해 중국어를 공부하느라 주위에서 얼굴을 보기 힘들 정도였다고 합니다. 관직에 오른 후에도 꾸준히 실력을 쌓는 이러한 노력은 사신으로 명나라를 방문하거나 임진왜란으로 명나라와 연합군을 형성했을 때 조선에 유리한 상황을 이끌어 내는 데 큰 도움이 됐지요. 또한 황해도 안주목사 시절, 백성들이 굶주림에 시달리자 쌀 1만 석을 푸는가 하면 누에를 길러 실을 뽑을 수 있는 양장 기술을 가르쳐 당시 백성들이 보다 나은 삶을 누릴 수 있도록 지도했습니다. 이 외에도 대동법의 시행을 강력하게 주장하고 시행하는 등 백성을 생각하는 애민정신까지 두루 갖춘 분이었습니다. 저는 이원익 선생의 청백리 삶과 함께 이러한 보국애민사상을 의정활동 내내 마음에 되새기며 잊지 않고 기억하겠습니다. 경기도가 더욱 살기 좋은 곳이 되고, 도민이 다 함께 행복할 수 있는 정책 마련을 위해 항상 힘쓸 것을 약속드립니다.

유근식 의원(더불어민주당, 광명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