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조각, 나전칠기
김정열 나전칠기장 보유자
(경기도 무형문화재 제24호)
김정열 나전칠기장을 만나기 위해 양주의 나전칠기 전시관에 들어섰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방 깊은 벽에 전시된 나전칠기 작품들이 눈에 띄었다. 조각조각 반사된 빛이 새어 나와 눈을 비볐다. 커다란 작품부터 작은 보석함까지 저마다의 빛을 냈다. 아름다운 나전칠기 작품을 보며 그 속에 스민 장인의 시간을 잠시 상상했다. 경기도 무형문화재 제24호 김정열 선생의 서사가 조각조각 빛나고 있었다.
김정열 선생은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통영의 나전칠기 공방에 들어갔다.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나전칠기 장인이자 스승인 안창덕 선생의 문하생이 됐다. 어린 시절 김정열 선생은 판사를 꿈꿨지만, 그의 재능과 환경은 운명처럼 나전칠기 장인의 길로 안내했다. “처음에는 어머니가 통영에 있는 안창덕 선생님 공방으로 저를 데려갔습니다. 배우고 오라고 하시고는 떠나셨죠. 1968년도 3월이었어요. 거기서 광내는 일부터 시작했습니다.”
그는 나전칠기에 남다른 재능을 보였다. 문하생이 된 지 3년 만에 17살의 어린 나이로 공방 책임자까지 맡게 된것이다. 그러나 삶은 녹록지 않았다. 그는 어머니의 암투병 등 기구한 일들을 마주한다. 결혼 이후에도 어려운 생활을 이어 갔다. “처음 양주에 왔을 때 정말 힘들었어요. 거칠게 말하자면 노예처럼 일했죠. 지금도 그때 입었던 작업복을 가지고 있어요. 아직도 그 옷만 보면 눈물이 납니다. 그것이 저 같은 쟁이의 한이고 표시라고 생각해요. 재능도 중요하지만 진짜 중요한 건 끈기와 정신력입니다.”
김정열 선생은 나전칠기를 설명하며 기초를 강조했다. 동시에 기초를 다지며 겪는 지난한 시간을 견딜 끈기와 정신력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어린 시절부터 기계처럼 일했습니다. 어깨에서 소리가 날 정도로요. 처음 나전칠기를 배울 때 스승님이 정말 엄하게 가르치셨어요. 기초를 탄탄하게 다져 주려고 그러셨던 거죠. 지금 생각해 보면 안창덕 스승님을 만난 건 정말 다행입니다.”
그는 나전칠기에 남다른 재능이 있었지만, 그에 안주하지 않았다. 끊임없이 기초를 다지고 기술을 익혔다. 전수생들에게도 항상 기술보다 끈기와 정신력을 강조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재능은 노력이라는 빛을 받아야 비로소 빛난다. “기초가 탄탄한 사람은 실수가 적어요. 중간에 어떤 문제가 생겨도 대처할 수도 있죠. 물론 하늘이 내린 재능이 분명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에요. 끊임없이 기초를 다지고 노력해야 진짜 장인이 될 수 있는 거죠. 제 전수생들에게 끈기와 정신력을 강조하는 이유입니다.”
초창기 나전칠기는 왕실과 귀족을 위한 문화였다. 현대에 이르면서 생활 공예품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특히 1970~80년대에는 대대적인 유행을 타기도 했다. 그러나 모순적이게도 그때부터 진짜 나전칠기는 점점 설 곳이 사라지고 있었다. “전통 나전칠기는 옻나무 수액을 발라 마무리합니다. 나전칠기의 칠(漆)은 옻을 뜻하는 한자어죠. 일제강점기 이후에 옻칠이 된 전통 나전칠기가 많이 사라졌습니다. 또 공정이 기계화되고 대량생산이 되면서 전통 제조 방식을 잃기도 했죠. 지금은 시중에서 전통 나전칠기를 찾아보기 어려워졌습니다.” 김정열 선생은 전통 방식의 나전칠기를 만들기 어려워졌다고 말한다. 환경이 변하며 좋은 재료를 구하기 어려워진 것도 있지만, 결정적인 이유는 나전칠기의 가치가 떨어졌기 때문이라고. 그는 전통 나전칠기가 예술품으로 인정받아야 명맥을 이을 수 있다고 말했다.
“나전칠기의 나(螺)는 소라를 뜻합니다. 소라는 유일하게 밤에도 빛나는 패(貝)죠. 좋은 나전칠기는 좋은 디자인과 재료에서 출발합니다. 기술은 세 번째예요. 그래서 저는 나전칠기가 미술로 인정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회가 변했지만, 장인과 예술가를 대하는 자세는 여전히 비슷합니다. 예술가가 더 대우받는 게 현실이죠. 나전칠기는 예술로 대우받아야해요. 세계적으로 우리나라 전통 나전칠기가 최고인데, 그걸지키는 방법은 대우를 해 주는 것이죠.”
김정열 선생은 마지막으로 전통 나전칠기에 관심 가져 달라고 당부했다. 세계적인 수준의 전통예술을 지키기 위해 모두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소라는 밤에도 빛이 난다는 그의말이 떠올랐다. 전통 나전칠기는 무관심이라는 어둠 속에서 여전히 빛을 내고 있다.